(서울=연합뉴스) 기획취재팀 = 답답했다. 긴 터널 안을 걷는 것 같았다.중학교 2학년인 A양은 늘 외롭고 혼자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우울한 기분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지만 맞벌이하는 부모님은 바쁘기만 하다.소외감을 달랠 길 없던 A양은 점점 인터넷 채팅에 빠져들었다.
이곳에서 한 남자 대학생을 만났다.A양은 그와 인터넷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그에게 점점 의지했고 직접 만나자는 제안에도 응하게 됐다.그는 모텔에 함께 가자고 요구했다. A양은 그와 사이가 틀어질까 봐 결국 모텔까지 따라갔고 성폭행당했다.
◇자신도 모르는 가면성 우울증
10대 청소년의 우울증이 성인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이처럼 우울증 자체보다 더 충격적인 피해를 낳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별하고 세심한 주변의 관심이 필요하지만 청소년 우울증은 성인과 달리 우울한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가면성 우울증(masked depression)이라는 데 심각성이 더하다.
우울증이 무단결석 게임·인터넷 중독 비행 등 행동 문제나 학업부진과 같은 위장된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당연히 주변은 물론 자신까지 그 원인이 우울증임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서울시청소년상담지원센터의 이윤조 팀장은 "10대 우울증은 폭력이나 비행과 같은 품행장애와 인터넷 중독으로 나타난다"며 "필요 이상으로 분노하고 화내는 10대를 상담하다 보면 원인이 우울증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근본 원인인 우울증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만을 고치려고 들면 부모와 자녀의 불화만 심해지고 치료도 되지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 팀장은 "인터넷 중독 때문에 우울증에 빠지는 게 아니라 우울증 때문에 인터넷 중독에 빠진다"며 "그걸 모르고 부모는 인터넷만 그만두게 하려고 하지만 정작 그 뒤의 심리적 요인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울증은 정신병(?)
한국 사회에서는 우울증을 정신병이라고 여기고 이를 치료하려고 병원에 가는 것을 꺼리는 풍토가 청소년 우울증 문제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서울성모병원 정신과 전태연 교수는 "우울증은 정신병이라는 편견이 있는 한국에서 부모가 자녀의 우울증을 인정하는 게 쉽지 않다"며 "자녀가 우울증 증세를 보이면 마음이 약해서 그렇다며 다그치는데 이러면 우울증이 악화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부모와 청소년 모두 누구나 우울증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시소아청소년광역정신보건센터가 2005년 중고생 1천27명과 이들의 부모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자녀가 우울증 관련 장애를 안고 있다고 생각한 부모는 0.86%였지만 우울증이 있다고 대답한 청소년은 7.3%로 10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가면성 우울증의 특성에다 우울증에 대한 편견이 얽혔기 때문이다.치료하는 데 비용이 드는 탓에 우울증이 있는 청소년은 부모가 병원으로 데려와야 하는데 부모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다 보니 학교 경찰 법원과 같은 곳에서 치료나 상담을 의뢰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윤조 팀장은 "우울증으로 상담받는 학생의 90% 이상이 외부 기관의 의뢰"라고 했다.남자 청소년이 치료에 소극적인 것도 청소년 우울증의 특징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병원에서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은 여자 청소년은 2006년보다 28.1% 늘어났지만 남자는 3.4%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사랑샘터 청소년우울증센터 김태훈 원장은 "한국에서 여권이 신장하긴 했지만 아직까진 남성에 대한 기대가 더 높다"며 "부모가 아들이 우울증을 겪는다는 사실을 더 못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인식 때문에 부모가 딸의 정신과 치료에는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지만 아들은 쉽게 병원으로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강박적인 환경에서 남자 청소년은 우울함이 속으로만 곪다가 비행이나 폭력과 같은 형태로 표출되면서 2차 사고를 치게 된다.
◇되도록 빨리 전문기관 찾아야
청소년에게 우울증은 쉽게 발병하기도 하지만 제때 치료를 받으면 빠르게 회복된다는 점에서 예방과 조기 진단 치료가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성인은 보통 우울증이 생긴 원인이 여러 가지인데다 심리상태가 복합적이어서 치료의 실마리를 찾기 어렵지만 청소년은 상대적으로 사고 체계가 단순한 편이어서 원인을 찾기만 하면 비교적 치료가 쉽다는 것이다.
심한 경우 약물치료를 해야 하지만 청소년의 우울증은 정신과 병원 각 기초 지자체의 정신보건센터 한국청소년상담원 서울시청소년상담지원센터 등 전문 기관에서 상담치료를 지속하면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이윤조 팀장은 "치료를 꾸준히 받으면 청소년 우울증은 반드시 좋아진다"며 "혼자 고민하지 말고 전문기관을 찾아서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스스로 우울증 진단을 할 수 있는 간단한 체크리스트도 정신보건센터 홈페이지에서 구할 수 있다.무엇보다 우울증이 정신병이라는 편견을 없애는 것도 중요하다.
우울증은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보편적인 증상인데도 이를 부끄럽게 여겨 숨기는 것은 더 위험한 만큼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청소년이 정신병 환자라고 낙인찍지 말아야 한다.
일선 학교에서 우울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 팀장은 "친구와 수다떨기 운동과 같이 우울증을 예방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며 "부모도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자녀가 스트레스를 풀도록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1/11/01 07:29 송고